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역시 일본 해군은 강해 (문단 편집) == 해설 == 이 장면은 실화에 기반해서 그려진 것이다. 1942년 5월 4일에 있었던 도상훈련 때, 위 만화처럼 우가키가 "9발 명중은 너무 많다(9発命中は多すぎる)"고 우겨서 아카기를 부활시킨 웃지 못할 일이었다.[* 출처-川崎まなぶ 『日本海軍の航空母艦 その生い立ちと戦歴』] 당시 워게임의 적군(미군) 총사령관 마쓰다 지아키(당시 [[이세급 전함]] 휴가 함장)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나는 당시 '휴우가' 함장이었는데, 도상연습이 있어서, 미국통이라는 이유로 적색군(적군)의 총지휘관역이 됐어. 도상연습에서는 미군은 상당히 항속거리가 긴 비행기(육상기)로 색적(정찰)하지. 일본군은 함상기뿐. 미군은 일본군의 행동을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알 수 있었으니 하고 싶은 걸 얼마든지 할 수 있지. 그런데 내가 도상연습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것을 그대로 판정하면 사기에 악영향이라는 이유로 극도로 경미한 피해로 처리되어 작전 성공이라고 판정되었어.[[http://wgforum.kr/kancolle_war_museum/7453343|#]] 만화에서와는 달리 실제 역사에서는 일부 참모장들이 우가키의 억지에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이에 우가키는 "만약 항공모함을 한 대라도 잃는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진다"고 대꾸했다. 당시 일본은 모의훈련에서조차 진다는 것을 가정할 수조차 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우가키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항모를 대거 잃는 패배만 나오게 되자 우가키와 야마구치 등 고위 참모들은 작전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장관에게 작전의 대대적인 수정을 건의한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자신의 최대 성과였던 진주만 공습에 도취된 나머지 본인의 능력을 과신했고, 나머지 해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해군 커리어를 걸고서 MI작전을 실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작전의 전략적 방향성을 수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참모들이 지적한 작전안의 일체의 수정을 거부한 채 MI작전의 강행을 결정했다. 사실 이런 촌극이 벌어진 데는 당시 일본군의 조직문화 문제도 있다. 실패를 수치로 여기는 조직문화 아래에선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기도 어려웠고 이것을 빌미로 경쟁자들이 상대를 깎아내릴 정도로 가혹한 수준의 경쟁이 이루어졌기에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이 아닌 동료와 상사에게 잘보이기 위한 보신주의 전략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느 조직에서나 이러한 풍토는 발견되므로 보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으나 일본 육해군은 그 정도가 자정이 가능한 수준을 지나쳐 정상적인 전략 및 작전 구상이 어려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